2022년 4월 5일 화요일

격리구더기 - 불 속에서

 남자가 공원에 보인지 며칠 째, 처음에는 사람이 보이면 피하던 공원의 실장석들은 이제 남자가 무섭지 않단 걸 깨달았는지, 가로수 사이를 이리저리 걷고 있는 남자의 주변에 몰려들어서 데스데스 소리를 냈다.


월동 준비를 게을리 한 친실장들이었다. 인간의 도움을 받는다는 건 천에 하나 일어날만한 일이지만, 이들에게 있어서는 마지막 보루였다. 이 실장 중 대부분은 이번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얼어죽을 것이다. 


제발 바람만 피할 곳을 주십시오 하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가족도 같이 키워달라, 따뜻한 집을 달라, 배부르게 먹여달라...요구사항은 끝없이 높아졌다. 휴대용 링갈로 이 요구사항을 하나씩 듣던 남자는, 실장 하나를 지목해서 물었다.


"우리집에 가고 싶어?"


"말이라고 하는 데스우! 어서 와따시와 자들을 모시는 데스!"


"좋아, 그러면 가자. 네 골판지 하우스는 어디 있니?"


사육실장이 된다는 생각에 친실장은 손을 휘저으며 남자를 자신의 골판지 하우스로 안내했다. 그 모습을 부러운 듯 바라보는 들실장들. 남자는 친실장과 자들을 담은 골판지 하우스를 통째로 들고 저 멀리 사라져갔다. 친실장의 치프프픗 소리는 남겨진 실장들의 가슴을 찔렀다.


"데...추운데스..."


누군가가 이 말을 꺼내자, 실장들은 하나 하나씩 우수수 흩어졌다. 십일월 말의 바람은 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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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친실장의 가족을 담은 골판지 하우스를 자동차 트렁크에 실었다. 바닥에는 이런 일을 많이 해본 듯, 분변이 흘러넘치는걸 막기 위한 비닐이 깔려있다. "바닥이 파란색인데츄!" 신기해하며 떠드는 자실장들.  "인간 노예는 와따시를 어디로 데려가는 데치? 고귀한 와따시들의 수준에 맞는 곳이었으면 좋은데치." 미래를 얘기하는 장녀. 


그리고 조용히 치프프픗 웃고 있는 친실장. 비천한 들실장들처럼 쓰레기를 주워오는 대신,  물웅덩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가을 내내 연습한 메로메로가 통한 것이다. 똥인간에겐 무엇을 사달라고 할까? 세레브한 진주목걸이 정도면 좋은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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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한적한 강변에 차를 세우고 트렁크를 열었다. 실장석들의 온갖 개소리가 쏟아졌지만 남자는 무시하고 트렁크 밖으로 나온 실장석을 한 마리 한 마리 집어서 골판지에 다시 넣었다. 청테이프로 골판지를 밀봉한 남자는 박스를 강가 자갈밭 위로 옮겼다. 


주변 주유소에 갔다 온 남자의 손에는 등유 한 깡통과 신문 한 부가 들려있었다. 박스 안에서는 골판지를 두드리는 듯 한 통통통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링갈을 꺼내들었다. 


"노예새끼! 당장 와따시를 바깥에 꺼내놓는 데치!"


혼자 힘으로 골판지 하나도 못 찢는 벌레들이 입만 살았구나. 남자는 픽 웃었다. 등유 깡통을 열고 골판지 하우스 위로 퍼붓는다. "이게 무슨 냄새인 데스!" 친실장의 노성이 들려온다. 남자는 링갈의 녹음 기능을 켰다.


신문지 다발에 불을 붙인 남자는 불꽃이 충분히 커질 때까지 기다린 뒤, 등유에 푹 젖은 골판지 하우스 위로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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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판지 하우스의 천장에서 불이 확 하고 불타오른다. 천장에 붙은 불은 순식간에 골판지 하우스 벽으로 옮겨갔다. 아까 등유를 뒤집어 쓴 자실장 한 마리는 "테챠아아아아으으아아아악!" 목이 찢어지는 비명을 지른다. 온 몸이 불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닥에서 요동치는 칠녀를 본 친실장은 "마마가 가는데스!" 하면서 칠녀에게 달려들었다. 손으로 불을 털어내려 하지만 화상만 입을 뿐이다. 몇 옥타브를 넘나드는 비명을 계속해서 지르던 칠녀는 성대가 완전히 파열됐는지 꺽꺽 소리만 내면서 타들어갔다. 골판지 하우스 안의 공기가 작열한다. 뜨겁다. 불똥과 재가 친실장 위로 쏟아진다


동생들을 안고 있던 장녀의 치맛자락에도 불꽃이 옮겨붙는다. "뜨거운데치! 뜨거운데치! 똥노예는 와따시를 안 구하고 뭐하고 있는 데챠아아아악!" 바닥을 뒹구는 장녀. 장녀의 몸에 부딪혀 벽에 이리저리 날아가서 불이 붙는 동생들. 골판지 하우스 안에 가득 찬 것이라고는 연기와 비명밖에 없는 듯 했다. 


친실장도 어느새 소름이 끼치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머리와 두건에 불이 옮겨붙었기 때문이다. "마마가 너희를 구하는 데꺄으아아아아아아악!" 친실장은 자신의 몸에 불이 붙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살아있는 듯 해 보이는 자를 구하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었지만 헛수고일 뿐이었다.


곧 친실장의 몸에 불이 완전히 옮겨붙었다. 불이 붙은 골판지 하우스 벽면을 미친듯 두드리던 소리는 불꽃과 연기에 묻혀 곧 조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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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아아아아아악!" 


옷에 불이 붙은 남자 아이가 바닥을 미친듯이 뒹군다. 집 안은 불꽃과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탁 탁 소리가 집안 곳곳에서 들린다.


울음 섞인 비명을 지르며 남자아이에게로 뛰어가는 엄마. 맨손으로 불을 털어내려고 옷을 툭툭 쳐보지만 피부가 시뻘겋게 변할 정도로 화상만 입을 뿐이다. 벽에 기대서있던 딸아이의 몸에도 어느새 불이 붙는다.


"엄마 살려줘아아아아아아악!" 


자식을 살리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엄마의 몸에도 어느새 불이 붙는다. 부서진 천장에 가로막힌 문을 쿵쿵 두드려 보지만 반응은 없다. 


곧 가족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삼켜진다.


새로 개봉한 영화 "불 속에서" 의 장면 중 하나이다. 현실같이 생생한 비명 연기에 관객과 평론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실제로 집에 불을 질러본 것 아니세요?" 라는 기자의 농담 섞인 질문에 음향 감독은 애매모호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아직 젊은 나이에, 화재 현장을 그 자리에서 촬영한 듯 생동감있게 묘사해낸 능력에 감독들은 감탄했다. 내년에 개봉될 재난 블록버스터에 참여해볼 의향이 없냐는 제안도 몇 건 들어올 정도이다. 


오늘도 남자는 공원의 가로수 주변을 이리저리 걸었다. 실장석들이 남자를 둘러싸고 데스데스 울었다. 인간의 도움을 받는 건 천에 하나 일어나는 일이지만, 식량 계산을 잘못하거나 솎아내기에 실패해 식량이 바닥나버린 실장들에게는 인간은 마지막 보루였다. 이들 중 대부분은 첫 눈 이후 굶어죽을 것이다.


남자는 친실장 하나를 지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