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5일 화요일

격리구더기 - 마마가 말한대로

 

"요것들아, 왜 여기서 벌벌 떨고있니?"


엄지는 고개를 들었다. 아까는 거리 한구석에서 가로등을 바람막이 삼아 덜덜 떨고 있었는데, 어느새 깜빡 잠이 들어버린 모양이다. 주변은 어두웠다. 품 속의 구더기짱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프니...레후...잠꼬대를 하고 있었다.


남자는 불쌍한 표정으로 엄지와 구더기 자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짐승도 제 새끼는 안 버리는데...짐승만도 못한 것들. 너희들 여기 있으면 얼어죽는다. 우리 집에 가자."


넓게 보자면, 실장석이 길거리에서 누구한테 주워질 확률은 극도로 낮다. 하지만 홀로 있는 엄지나, 엄지와 구더기 페어는 길거리에 내놓으면 십 중 팔구는 누군가가 주워간다. 지나가는 사람을 애처롭게 바라보는 길냥이처럼, 구더기를 어떻게든 보살피려고 아둥바둥하는 엄지의 모습은 동정심을 사기 충분하기 때문이다.


주제를 모르고 제 잘난줄 아는 자실장이나 걸핏하면 자를 갖게 해달라고 징징거리는 성체 실장과는 달리, 엄지 실장은 어느 정도 예절이란게 몸에 익어 있다. 가족 내에서 노예 비슷한 취급을 받기에, 누굴 보건 공손하게 대한다. 가족이 먹고 남은 찌꺼기라도 주워먹으면 감사하기에 어떤 음식을 줘도 불평을 내뱉지 않는다. 기르기에는 가장 이상적인 실장인 것이다.


엄지 실장 다음으로 인기가 좋은 건 구더기지만, 프니프니를 시도때도 없이 해줘야 한다는 것 때문에 보통은 며칠 내로 버려지거나 프니프니를 못 받아서 파킨사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엄지와 구더기를 같이 키우면 이 문제는 해결된다.


보통은 실장 가족의 겨울식량으로 쓰이는 엄지와 구더기라서 바깥에 얌전히 버려진 걸 볼 기회는 별로 없다. 샵에서도 굳이 엄지 실장과 구더기를 브리딩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엄지 실장을 주워 기른다는 건 애호파에겐 꽤나 운수 좋은 일이다 


엄지와 구더기 자매를 집어들고 간 남자는 원래 실장석에는 별 관심이 없었었다. 단지 즉흥적으로 기를까 생각이 든 것 뿐. 따뜻한 손 안에서 혈색이 점점 돌아오는 엄지와 구더기를 보며 남자는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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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는 항상 공손하게 굴어야 하는 데스. 와따시들의 가족은 네 행동에 운명이 달린걸 알고 있는데스."


엄지는 자면서 마마의 꿈을 꾸었다.


"만약 인간에게 선택된다면 다른 자매들을 봐도 입을 다물어야 하는 데스. 같이 키워달라고 하면 인간의 심기를 거스르게 하는 데스. 자매 걱정은 하지 말고 네 걱정부터 먼저 하는데스."


마마는 골판지 하우스 안에서 큰 자매들에게 예절교육을 하고 있었다. 엄지는 골판지 밖에서 낙엽을 줍고 있었다. 어차피  기대를 걸지 않는 자라면, 힘들여 교육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엄지는 골판지 벽에 귀를 대고 마마의 말을 들었다. 


꿈이 바뀌고, 배경도 아까 서 있던 가로등 밑으로 바뀌었다. 


"너는 여기서 기다리는 데스."


자매들의 손을 이끌고 점점 멀어지는 마마. 오늘은 마마가 음식을 구하는 법을 가르쳐주겠다면서 자매들과 다 같이 나간 날이다. 모아 둔 음식은 넉넉했지만, 친실장은 "지금 배워둬야 마마가 없어도 살아남을 수 있는 데스." 라면서 자들을 전부 끌고 나갔다.


교육 겸, 쓸모없는 입 두개를 내다버리는 셈이다. 


"마마! 날씨가 너무 추운데츄!" "추운레후..."


엄지는 구더기짱을 안고 발을 동동 굴렀다. 마마를 쫒아가고 싶었지만 무거운 구더기짱을 안고는 불가능하다. 친실장은 어느새 저 멀리까지 가 버렸다. 매서운 칼바람이 불어온다. 엄지는 구더기짱을 안고 가로등에 기대앉았다.


"와따시들은 버려진데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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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남자는 엄지와 구더기를 자그마한 박스 안에 넣고 실장 숍으로 가고 있었다. 실장석을 제대로 키우려면 준비해야할 게 꽤나 많았다. 집, 화장실, 장난감, 푸드, 콘페이토, 그림책... 실장석 카페의 공지글에서는 엄지실장은 꽤나 귀한 실장이니 잘 키우라고 적혀 있었다. 말도 잘 듣고, 밥도 안 가린다면서.


링갈이라는 것도 스마트폰에 처음 다운받아봤다. 눈을 뜨자마자 "신세를 지겠데츄" "인간상 안녕 레후!" 라면서 인사를 하는 실장 자매들. 카페에서는 이런 특징을 "개념실장" 으로 분류해 두었다. 상담을 위해 올린 질문 글에는 "초심자의 행운" 이라면서 부러워하는 댓글도 꽤나 있었다.


남자는 괜스리 기분이 좋아졌다. 콧노래를 룰룰루 부르면서 실장 숍으로 걷는 길. 길 중간쯤에는 남자가 평소에 자주 가던 공원이 있었다. 숨도 고를 겸, 남자는 공원 벤치에 잠깐 앉아서 쉬고 가자고 생각했다.


남자는 정확히 말하자면 애호파도 학대파도 관찰파도 아니었다. 귀찮게 구는 실장석은 걷어차고, 가끔 공원에 와서 먹이나 뿌려주는 정도. 늘 앉던 벤치에 앉아서 주머니에서 자그마한 실장 푸드 봉지를 꺼낸다. 남자가 오면 항상 재롱을 부리는 자실장들은 오늘도 남자 앞에 몰려들어서 테치 테치 재롱을 부렸다.


동족의 소리를 듣고 박스에서 고개를 살짝 내민 엄지는 곧 헉 소리를 냈다.


와따시의 자매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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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무릎에 놓인 박스 속에서 고개를 내민 엄지. 자실장들은 엄지를 보자마자 얌전했던 평소와는 달리 "테챠아아악! 하고 악을 쓰기 시작했다. 


남자는 평소에 링갈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링갈 앱도 받은 참에 이놈들이 무슨 말을 하나 궁금해서 앱을 켜 봤다.


그리고 남자의 얼굴은 바로 굳었다.


"엄지가 왜 저기 있는테치! 인간상은 비천한 엄지 대신 귀여운 와따시를 키워야 하는 테치!"


"테챠아아악! 네년은 당장 거기서 나오는 테치! 사육실장은 와따시가 되어야 하는 테치!"


친실장의 계획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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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공원에 와서 먹이를 뿌리는 인간상. 그 인간상이라면 아마도 자들을 맡아줄지도 모른다. 자신의 자가 예의범절이 좋아서 인간상의 기분을 좋게 해준다면 와따시도 같이 사육실장이 될 지도 모른다.


이게 친실장의 계획이었다. 이 날을 위해, 친실장은 자들에게 온갖 예절교육을 시킨 것이다. 하지만, 친실장은 질투에 대한 교육은 딱히 시키지 않았다. 자들은 전부 사이가 좋았고, 엄지는 적당히 일이나 시켜먹다가 식량이 줄어들 때 쯤 되면 버릴 생각이었다. 


그리고 자실장들은 하인에서 사육실장이 된 엄지를 보자 여지없이 본성을 드러내었다.


"저런 비천한 벌레를 키우다니 인간상은 생각이 있는테챠악!"


남자는 얼굴을 찌푸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 걸음 뗄라고 하던 차에, 신발 옆에 뭔가가 촥 하고 떨어진다.


자실장 중 하나가 투분을 한 것이다. 


"이 벌레새끼들이!" 


더 이상 참지 못한 남자는 똥을 던진 자실장을 걷어찼다. "테갹!" 소리를 내며 붕 날아간 자실장은 나무에 부딪혀서 피떡이 되었다. 다른 자실장들은 비명을 지르며 골판지 하우스 쪽드로 도망쳤다.


"마마! 마마악!"


자들의 비명을 들은 친실장이 황급히 뛰쳐나왔다. 열이 머리끝까지 뻗친 남자는 그대로 친실장을 짓밟았다.


"니들 벌레새끼들이 다 똑같지!"


"데컥..컥.."


남자의 발 아래 짓밟힌 친실장은 숨이 막힌지 컥컥 소리를 내었다. 박스에서 고개를 내민 엄지와 친실장의 눈이 마주친다.


"입을 다무는 데스. 네 걱정부터 하는 데스."


친실장이 했던 말이 엄지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다. 



엄지는 온 힘을 다해 비명을 참았다. "마마레후~" 구더기는 지금 벌어지는 일을 모르는지 마마를 보고 즐겁게 웃는다. 친실장을 납작하게 짓밟은 남자는 저 멀리 떨어진 골판지 하우스를 발견했다. 태어나서 자라온 골판지 하우스가 남자의 발길질에 저 멀리 날아가는 것을 보며 엄지는 눈물을 흘렸다. 


언니들이 귀퉁이 하나도 양보해주지 않던 타월, 손도 못 대보던 식량, 목이 죽을거같이 말라야 겨우 한 모금 마실수 있던 페트병 속의 물... 모두 남자의 발 밑에 짓밟히고 걷어차였다. 


엄지의 입에서 비명이 새어나왔다. "테챠아아아아아..." 신명나게 자실장 하나를 몇 번이고 걷어차던 남자는 엄지의 비명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엄지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부서진 집과 몸이 반쯤 박살난 실장들을 보고 있었다.


"아, 니네 동족들이지. 못 볼 거를 보여줬구나."


남자는 자실장을 걷어차는걸 그만두고 몸을 돌렸다. 남은 가족의 비명과 위협 소리는 이제 도와달라는 애원으로 바뀌었다. 엄지는 귀를 막고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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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쯤 박살난 골판지 사이로 바람이 숭숭 들어온다. 모아놓은 식량은 흙이 섞여서 맛이 없다. 물도 다 쏟아져버렸다. 


그리고 두 명의 자가 죽었다.


하반신이 짓뭉개진 친실장은 망가진 하우스 옆에 누워서 눈물을 흘렸다.


남자의 발길이 끊긴 공원에서는 며칠간 데에엥 테에엥 울음소리가 나더니, 겨울비가 한번 내린 뒤로 어느 새 잠잠해졌다.